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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몰락하는 자 [ 토마스 베른하르트 ]

    1
    나유정(@tjsdlswkd1)
    2016-11-16 08:11:02




몰락하는 자     [ 토마스 베른하르트 ]
 
 
중독은 대개 아무 의미도 갖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술이나 문장에 중독되는 건 문장에
심취해서도 술을 사랑해서도 아니다. 다만, 그것들을 사랑하고 취하려 애쓰는 척 스스로를 몰아가려는 경향에 불과하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라는
물음은 타당할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중독엔 딱 꼬집어 말할 만한 맥락이 존재하지 않는다. 맥락이 있다면 그건 중독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몰입의
속도와 관련될 뿐, 어떤 일관된 내용과 지향점을 갖지 않는다. 그저 빠지기 위해 빠져들 뿐이다.
 
 
“글렌과 냉혹성, 글렌과 고독, 글렌과 바흐, 글렌과 [골트베르크 변주곡], 난
생각했다. 글렌과 산림 스튜디오, 인간에 대한 글렌의 증오, 음악에 대한 증오, 음악인에 대한 증오, 난 생각했다. 글렌과 간결함, 식당을
둘러보면서 난 생각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알아야 해, 난 생각했다.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페터 한트케, 엘프리데 옐리네크 등과 더불어 20세기 독일어권 문학계의
이단아로 통한다. 셋은 공히 오스트리아에서 성장했으나 모국에 대한 분노와 인간과 예술에 대한 환멸을 독자적인 방식의 언어 살해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종종 같은 범주로 묶인다. 하지만 문학사의 특정 경향은 한약방의 약재 상자처럼 일목요연하게 분류될 수 없는 법이다. 문학은 결국, 어떤
개인의 지독한 체취에 불과할 수 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자기 안의 요설들을 가감 없이 토해내는 방식으로 기존 소설의 서사구조를 뒤틀어놓는다.
그렇게 그는 오스트리아 문학계의 ‘악한’ 또는 ‘내부의 적’이 됐다.
 
[몰락하는 자]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화자인 ‘나’와 친구 베르트하이머는 28년 전
레오폴츠크론 지역에서 호로비츠로부터 피아노를 사사했다. 그때 그들은 살아 있는 피아노의 신화 글렌 굴드를 만났다. 베르트하이머는 글렌의 천재성에
절망을 느낀 나머지 피아노를 포기하고 정신과학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끝내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밑도
끝도 없는 장광설을 풀어놓는다. ‘나’는 베르트하이머가 자신의 불행이 사라지는 게 두려워 자살한 것이라 결론짓는다. 그러나 여기서 잘 알려진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를 연상하는 건 문제의 핵심에서 많이 벗어난다. 이 작품은 인간관계의 어떤 정식이나 애증의 복합구도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베른하르트는 예술과 자연, 사랑과 집착, 그리고 질투에 대한 뿌리 깊은 천착을 통해 언뜻
뒤집어진 채 매장돼 있는 숨은 진실들을 파헤친다. 이를테면, 더 악해지거나 죽기 위해 사는 열망도 존재한다는 사실. 자연이든 예술이든 완벽한
아름다움이란 인간을 옥죄는 우주의 사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 삶을 위한 인간의 모든 노력이 실상은 은밀한 파멸충동에 대항한 소심한 분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이 모든 ‘어두운 진실’들은 어쩌면 예술이 진정으로 탐구하고 제시해야 하는 ‘진짜 문제’들일 수 있다.
베른하르트는 이렇게 자문자답하는 듯하다. 예술이 위대한가. 아니다. 삶을 초과하는 모든 것은 삶을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몰아넣을 뿐이다. 마치
거대한 산의 그림자가 마을의 빛을 잠식해버리는 것처럼.
 
 
늘 그렇듯, 베른하르트는 이야기를 지어내기 위해 소설을 쓰지 않는다. 그는 “산문의 언덕
너머로 이야기가 끼어들 기미가 보이면 곧바로 쏘아 죽인다”고 말할 정도다. 그는 그저 스스로를 끝닿는 데까지 몰아가는 정념과 분노, 그리하여
소진되는 세계에 대한 비전과 자아의 궤멸 양상만을 적나라한 말의 범람을 통해 보여줄 뿐이다. 허영과 위선, 가식과 환멸로 지탱되는 세계의 위장막
앞에서 그는 벌거벗고 소리친다. 그 외침은 그러나 자신을 더 커다란 고독의 상자 속에 가두는 울타리가 된다. 고독의 농도가 짙은 만큼, 울타리
속의 공기는 더 팽팽하고 첨예하다. 내밀한 소리로 응결된 음표들이 그 안에 잔뜩 부유한다. 공허가 딴딴하게 뭉쳐지면 칼날이 되고, 분노가 안으로
삭으면 섬려한 가시가 된다.
 
베른하르트는 날카로운 언어의 가시와 사유의 칼날로 스스로 부풀어 오른 고독의 맨살들을
발라낸다. 어떤 짐승의 본능에 가까운 몸부림과 애잔함, 폭발 직전의 광기와 세계와 결별하기로 작정한 자의 통 큰 회의가 그 안에 가득하다.
대신, 모든 감정이 중화된다. 슬픔이 넘쳐 눈물은 돌멩이가 되고 냉소와 위트가 소스라치게 곤두서 되레 말라붙은 사막이 펼쳐진다. 쓰리고
침침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중독이 그러하듯, 한번 몸을 담그면 쉬이 빠져나올 수 없다.
 
만인의 이해가 미덕인 양 권장되는 건 예술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다. 글렌 굴드는 그게 싫어
중증 결벽증 환자로 살다 갔다. 그런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굴드는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굴드일까. 혹시 그는 베른하르트가 암살하고 싶어
했던 또 다른 인생의 적, 그 자신의 숭고한 자아가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대중의 환희는 예술에 대한 경망스러운 모독에 지나지 않는다. 파멸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사는 삶도 있는 법이다, 세상에는. 그 앞에서 섣불리 울지도 웃지도 말라. 정말 그의 옷섶엔 번쩍번쩍 살기가 도는 총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니까.
 
 
토마스 베른하르트
 
1931년 네덜란드 헤이를런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조국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외조부모 밑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질병, 고독, 파멸, 죽음이라는 테마에 천착했고, 쇼펜하우어와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았다. 과장과 언어 파괴를 주요
기법으로 하여 스스로를 ‘이야기 파괴자’라고 불렀고, 나치에 협력한 조국 오스트리아에 대한 강한 비판이 담긴 작품들로 시대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저작권이 유효한 자신의 작품이 오스트리아에서 출간 또는 공연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소멸] [혼란] [바텐]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등의 작품으로 오스트리아 국가상, 게오르크 뷔히너상 등 유럽의 권위 있는 주요 문학상을
휩쓸었다. 소설, 시, 희곡을 포함해 60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고, 1989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 강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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