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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울린 분홍빛 타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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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유정(@tjsdlswkd1)2016-04-21 22:20:00

나를 울린 분홍빛 타올
해마다 봄이 오는 길목에 서면 더 곱게 피어나기 위해 몸살을 앓으며 잔기침하는 꽃의 목소리가
내 마음에 더 가까이 들려온다. 연초에 8박 9일의 피정을 하고 나면 이내 이른 봄이 시작된다. 이즈음 수녀원에서는 부활 축제를 앞두고 사순
시기에 들어가 절제와 극기의 40일을 지내는데 이때는 나도 한 송이 봄꽃처럼 슬슬 몸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이 아픔의 정체가 무엇일까, 생각하던 어느 날 약 40년 전에 종신서원을 같이한 동료 수녀님
한 분이 불쑥 내 방에 들어오셨다. 그러더니 “지금 우리가 침묵 피정 중이지만 이렇게라도 한 번은 표현을 해야겠어요” 하면서 나를 꼭 안아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했다. “수녀님이 아픈 줄은 진작에 알고는 있었으나 그렇게 많이 아픈 줄은 정말 몰랐어요. 이번에 나온 책을 보니 참느라고
수고를 많이 하셨던데… 고마워요!” 그의 덕담에 나는 좀 당황스럽기도 해서 “책에 쓰인 것이 나 혼자만의 아픔은 아니고 다른 이의 아픔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라고 얼버무렸지만 따뜻한 맘씨의 그에게 새삼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7년 전 암수술을 받은 이후 구체적으로 투병 일기나 에세이를 써보라는 부탁을 여러 번
받아왔다. 나는 모든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할 능력도 안 되는데다 수도자로서 자신의 고통을 객관화시켜야 하고 함부로 표현해선 안 된다는 평소의
생각이 흔들릴 것 같아서 거절해오곤 했다.
아프면 아프다 말해도 되고 울고 싶으면 혼자 있을 때 조용히 울어도 된다고 지인들은
권유했지만 나는 자신의 병 때문에 울지 않는 것을 늘 자랑 삼아 이야기해오곤 하였다. 그런데 항암 치료를 받던 어느 날인가 내가 서울 성모병원에
갈 때면 들리는 분원(경기 의왕시 성라자로 마을 수녀원)에서 나는 왈칵 눈물을 쏟고야말았다. 내가 머무는 방의 서랍장을 열다가 나온 분홍빛
커다란 타월을 보고나서였다. 이건 전혀 예기치 않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2008년 여름 갑자기 입원하면서 이것저것 나름대로 준비를 해갔지만 미비한 것들이 많았고,
나는 병원 가까운 곳에 살며 종종 귀한 간식도 날라다주곤 하던 피아니스트 신수정 교수에게 큰 타월 하나를 갖다달라고 했다. 빌린 것이었기에
언젠가 돌려주려고 임시 숙소에 보관해왔던 타월을 그제야 발견한 것이었다.
“아니 왜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지?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내 몸을 덮어주었던 친구라서 정이
들어 그런가? 묵상을 좀 해야겠네”라고 옆의 수녀들에게 말하고 나는 그 타월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대신 선물로 달라고 해서 부산까지 들고
내려왔다.
사람도 아닌 어떤 사물이 보이지 않는 위로와 감동을 준 그 순간의 기쁨을 나는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지금도 어쩌다 몸이 아플 때면 그 타월을 찾게 되고 그를 보는 순간엔 이상하게 꼭 눈물이 난다.
큰 수술을 하고 나서 수혈은 했으나 계속 열이 안 떨어져 몹시 괴로웠을 때, 갑자기 배가
아파서 견디기 힘들었을 때, 문병 온 이들이 위로 삼아 했던 말이 오히려 마음을 상하게 했을 때, 불면의 긴 밤을 보내며 문득 고독했던 순간에
고운 줄무늬의 분홍빛 타월은 늘 내 곁에 있었다. 요즘도 몸이 안 좋거나 몸살기가 있을 때면 그 타월을 꺼내 목에도 두르고 가슴이나 배 위에
덮으며 가만히 웃어본다. 그러면 ‘치유의 마법사’라도 된 듯 그는 나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 커다란 직사각형의 정겨운 타월에게 나는 사랑을
담아 한 장의 엽서를 쓴다.
나의 분홍빛 타월에게
2008년 7월의 더운 여름날
서울 성모병원 서병동
하얀 침대 위에서 나는 너를 처음 만났지
내가 즐거울 적엔 웃음을 적셔주고
아프고 슬플 적엔 눈물을 적셔주던 너
우리가 함께한 모든 시간들을 기억하니?
너를 내게 선물한 주인의 이름을 본 따
나는 이제 네 이름을 리나라고 부르겠다
우리 수녀원의 빨래 번호이기도 하고
행운의 번호이기도 한 88번이 수놓아져서
비로소 나의 소유가 된 분홍빛의 리나
세월이 지나 차츰 실밥도 빠지고 낡은 모습이 되었으나
나는 너를 다른 새것과 바꾸고 싶질 않구나
내가 씩씩하게 투병하여 아직 살아 있는 게 너도 기쁘지?
7년의 긴 시간과 더불어 고요하고 아름답게 익어간
우리의 우정을 함께 기뻐하며 자축하지 않을래?
앞으로도 우리 잘 지내자, 계속 나를 응원해다오
내가 너무 아파서 힘이 들 땐 더 많이 기도해주렴
사랑한다, 친구야 고마웠다, 친구야
네가 곁에 있어 행복했던 나
나도 너처럼 누군가의 숨은 힘
작은 위로자가 되어 살고 싶구나
- 이해인 수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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